최태성 강사가 전하는 '최악의 매국노' 인문학 강의
당시의 한국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였습니다.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의 주권을 상실했던 그 때, 이와 연결된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이 중에 두 명의 주요 인물, 이완용과 이석영의 행보와 그들의 선택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1910년, 우리나라의 국운이 침몰하던 그 시기, 이완용은 주목받는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해 땅을 사고 팔며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의 부유함은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고, 그는 그만큼 화려한 장례식을 가졌습니다. 특히 그는 전라도 지역의 곡창지대 땅을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재력을 대표하는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이완용은 세 번의 큰 사건, 즉 을사늑약, 정미실조약, 경솔국치에 모두 관여했습니다. 이 세 사건은 우리나라의 주권 상실로 이어졌고, 그 중심에 이완용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으로부터 큰 금액의 하사금을 받아, 현재 가치로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그의 부를 통한 투자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동산 투자였습니다.반면, 이석영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그 시기에 갖고 있던 땅을 팔았습니다. 이석영의 선택은 그의 경제적 상황이나 가족의 배경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집안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집안은 남양주에서 동대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가치는 현재로서 수조원에 이릅니다.이렇게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사람, 이완용과 이석영. 그들의 선택 뒤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석영과 그의 형제들은 그 시기에 회의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국가적 위기를 직시하며, 자신들의 재산과 미래에 대해 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결론적으로, 1910년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완용과 이석영, 이 두 사람의 선택은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 그리고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그런 집안에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을 때 주요 주제는 바로 그들의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들은 회의에서 주로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이런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나라의 존재였다. 그 나라 덕분에 우리 가족은 풍족하게 살아올 수 있었으며, 그 나라가 지금은 망하게 된 것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인 그들은, "우리는 이제부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결국, 그들의 결론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었다. 이석영은 그 결정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팔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그들은 만주로 이동하여 새로운 땅을 구매하였고, 그 땅에서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학교는 무상 교육을 제공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 학교는 시간이 흘러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 학교의 출신들은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그런데 이석영의 생애 마지막은 무척 슬프다. 그는 1934년에 아사, 즉 굶어서 사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끔찍한 죽음을 당한 이유는 일제의 감시와 압박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석영을 끊임없이 감시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인한 건강 악화를 겪게 되었다.이렇게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일부는 땅을 구매하는 것을 선택했으며, 일부는 땅을 팔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그 부를 창출해낸 사람들의 죽음은 굉장히 트라우마로 남았다.이석영처럼 땅을 판 사람은 굶어서 죽는 가슴 아픈 죽음을 맞게 되었다. 반면, 땅을 팔아 먹는 부유한 생활을 이어갔던 이완용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완용의 무덤은 현재 불명이다. 1926년에 그가 죽었을 때, 동아일보에 나온 사설은 그의 죽음을 비난하였다.그 사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완용은 일본, 돈, 권력의 보호 아래에서 살았지만, 그는 결국 죽음 앞에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역사의 법정 앞에 섰다." 이와 같은 현실은 일제 그림자처럼 깔린 역사의 틈에서, 우리가 여태까지 알아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한때 굴지의 집안에서 이루어진 한 회의, 그 회의에서의 논의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희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존경받고 잘 살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바로, 우리의 나라, 그 토대 위에서였다.우리의 역사는 단순히 패배와 굴복의 연속이 아닙니다. 이석영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불굴의 의지와 희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들의 결정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공유하며,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이석영의 삶과 그의 결정들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어려움과 도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이며, 우리 사회와 민족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이완용과 같은 배신자들은 잠시의 권력과 부를 위해 나라를 팔았지만, 그들의 행적은 결국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석영처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시간이 흘러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존경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결론적으로, 역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을 기억하며, 그들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석영의 삶을 통해 보여진 민족의 의지와 투쟁정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