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프롤로그
중에서
스스로 가혹하게 대하고 후회하는 당신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해법은 자기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삶의 동반자로서 스스로에게 친절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돌봄’이다. 우리는 흔히 돌봄을 나약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마치 아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동안 돌봄을 필요로 한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우리는 취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단, 어른이 되면 그 돌봄의 주체가 점점 자기한테로 옮겨와야 한다. 부모에게서 자기에게로 책임의 이전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발달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 전환에 실패한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존하려고 하거나 자기를 돌보는 대신에 싸우려고 들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돌봄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신체적인 것에 국한한다. 마치 먹이고 재우고 씻겨주는 것이 아이를 돌보는 일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부모와도 같다.
그러나 인간은 신체적 돌봄과 함께 정서적 돌봄도 필요하다. 나아가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가도록 관계를 돌보는 것도 필요하고,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영혼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 돌봄은 전인적이고 총체적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돌봄이란 한마디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흔들리지만 가라앉지 않는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
현주 씨는 작은 실수나 잘못에도 얼굴이 빨개지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가 되지만 유독 자기에게만큼은 ‘그럴 수도 있지’가 되지 않는다.
작은 실수를 저지를 때에도 너무 창피해서 그냥 어딘가로 숨고 싶을 따름이다. 사람들 앞에서 치부가 드러난 느낌이다.
더 큰 문제는 누군가 큰소리를 내면 어린아이처럼 깜짝깜짝 놀라고 얼어붙어 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상사는 화를 많이 내는 편이다. 그렇다고 현주 씨에게만 유독 화를 내는 것은 아니고 팀원 전체에게 그렇다.
동료들은 무서워하기보다는 ‘또 저런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물론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상사 앞에서는 심각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그런데 현주 씨의 반응은 동료들과 사뭇 다르다. 그녀는 겉으로뿐만 아니라 속으로도 그렇다. 잔뜩 긴장하고 얼어붙어 버린다. 상사가 “왜 일을 이런 식으로 했어!”라고 소리를 지르면 그녀가 설명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서 우물쭈물거린다. 그리고 꼭 뒤돌아서서 자책을 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하고.’
- 〈1-3 바보야,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중
수치심은 발작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맹독성의 감정이다. 물론 독이 약한 수치심도 있다. 예를 들면, 교실에서 소리 나게 방귀를 끼거나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지적받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누구라도 그 상황에 처하면 숨고 싶어지는 ‘보편적 수치심’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창피함’에 가깝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치심은 그런 큰 실수나 잘못이 없는데도 불쑥불쑥 엄습하는 ‘원초적 수치심’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원초적 수치심은 무엇일까? 이는 애착손상에서 비롯된 자기부정의 감정을 말한다. 원초적 수치심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감정이다. 다른 감정들은 구름처럼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유년기의 수치심이 바탕감정으로 굳어지는 이유이다.
- 〈2-1 수치심 발작_ 그냥 숨고 싶어〉 중
상처 난 마음은 건강한 마음과 작동방식이 다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3P+1F’의 특징을 지닌다. 3P는 ‘개인화(personalization)’ ‘일반화(pervasiveness)’ ‘영속화(perpetuation)’를 말한다.
개인화는 모든 문제나 사건을 자기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일반화는 부분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을 말한다. 개인화와 일반화는 아이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마음의 특징이다. 아직 인지나 감정의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 난 마음을 가진 채 어른이 된 이들은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 이러한 심리적 특징을 보인다. 영속화란 어떤 일이나 특성이 변함없이 지속될 거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어떤 문제가 원래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1F는 융합(fusion)을 말한다. 융합은 마음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사실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3P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기면 다 나 때문이고(개인화), 모든 게 문제이고(일반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영속화)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1F로 인해 그런 생각과 느낌을 사실이라고 믿게(융합) 된다. 그러니 그 마음 상태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 〈2-8 상처 난 마음_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중
어른들도 유난히 선호하고 각별하게 여기는 대상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위로를 받고 교감을 느끼는 대상을 말한다. 어른들에게 그 대상은 아이들보다 훨씬 다양하다. 인형이나 피규어일 수도 있고, 손때 묻은 책상이나 아끼는 옷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악기나 자동차일 수도 있다. 혹은 사물이 아닐 수도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함께한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나 연예인일 수도 있고, 자주 가는 카페나 산과 같은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자연과 신앙이 아닐까 한다. 나는 약 5년 전부터 자연 속에서 걷기 상담을 하고 있다. 2014년 안식년 여행을 통해서 자연이 얼마나 치유적 존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산은 나를 몰아세우는 훈련소였는데 중년이 되어 만난 산은 나를 품어주는 엄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걷기 상담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일대일 상담이지만 결코 일대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연’이라는 큰 품을 가진 존재가 공동치유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매번 받는다. - 〈3-3 의지할 중간대상이 필요하다〉 중
누구나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느끼면 연결감이 끊어지고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나만 힘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원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 혼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을 가장 큰 고통으로 느낄 만큼 뼛속 깊이 사회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고통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고 살아가게 만든다. 물론 보편적 인간성을 인식한다고 해서 원래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 그 고통을 겪는다는 마음에서 오는 수치심, 억울함, 고립감과 같은 2차적 고통이 약화되는 것이다. - 〈4-3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중
심리적 탈융합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간단한 방법을 소개하면 마음에 괄호를 사용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쓰는 용어로 ‘에포케’라는 말이 있다. ‘멈춤’ 혹은 ‘판단 중지’라는 뜻이다. 회의론자들은 사람마다 생각, 입장, 조건 등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는 물론 확고한 지식 또한 부정한다.
에포케는 독일어로 ‘괄호넣기 혹은 괄호치기’로 번역된다. 즉, 판단에 해당되는 마음의 영역을 우선 괄호 안에 묶어두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주관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바로 사실화시키지 않고 생각을 생각으로 기억을 기억으로 상상을 상상으로 그냥 하나의 마음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챙김도 비슷하다. 마음을 바로 사실화시키지 않고 괄호를 침으로써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해 괄호를 넣어보자.
[저 사람이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판단] [지금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판단] [지난번에 안 됐으니 이번에도 안 될 거라는 생각] 이렇게 자기 마음에 괄호를 만드는 것이다. - 〈5-6 내 마음에 괄호넣기〉 중
돌아보면 나는 20대 초중반이 가장 힘들었다. 시대 상황도 암담했지만, 친한 친구들이 서울로 학교를 가고 혼자 지방에 남겨졌다는 사실도 힘들게 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점은 대학을 들어간 후 스스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 막막했다.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든 게 쉽지 않았다.
1학년 내내 그런 상태였다. 그러다가 어느 책에서 한 문장을 만났다. ‘흔들리지만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말이었다. 라틴어 원문으로는 ‘Fluctuat nec margitur’라고 한다. 그 당시에 내 심정이 아마 곧 침몰할 것 같은 난파선에 올라타고 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문장 전체가 내 가슴 깊은 곳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젊음의 시간 내내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전에는 흔들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자책했지만 그 문장을 만나고 난 뒤로는 흔들리는 것을 허용할 수 있었다. 늘 제대로 길을 가야 한다고 다그쳤다면 이후로는 헤맬 수도 있고 방황할 수도 있음을 용납할 수 있었다. - 〈6-7 ‘흔들리지만 가라앉지 않는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