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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강사님
강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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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부여( 동기부여, 삶의자세 )
인문학( 문학, 시 )
창의( 창의, 창의력 )
힐링( 힐링, 희망 )
안녕하세요. 스타 강사 섭외 전문 업체 호오컨설팅입니다.
오늘 포스팅은 스타 강사 정호승 시인 강의 '슬픔의 감정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이유' 인문학 특강 강연입니다.
오늘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슬픔에 대한 감정을 서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리가 그것을 간단하게 희로애락이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로애락 중에서 애에 속하겠죠.
왜 슬픔의 감정이 우리 삶에 중요할까?
저는 그것을 제 어머니가 저한테 하신 말씀으로 먼저 말씀을 드려볼까 싶습니다.
제가 시를 쓰고 있으니까 시를 쓰는 아들한테 하고 싶었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시는 슬플 때 쓰는 거다."
어머니가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제가 시를 쓰면서 슬프지 않을 때 시를 쓰지 않은 적이 없는 거예요.
저도 늘 제 마음이 슬플 때 시를 썼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제가 올해 한국 문단에 등단한 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약 1100여 편의 시를 쓰고 발표해 왔는데요.
제시의 발원지
제시는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어떤 비극입니다.
모든 예술은 그 인간 삶의 비극에서 꽃이 핀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비극의 꽃이 바로 예술이고 문학이고 시다.
그래서 신은 비극을 토양으로 해서 자라나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요.
인간의 비극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의 슬픔이다라고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슬픔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바로 저는 고통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그 슬픔 그 슬픔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저의 경우는 시를 쓰게 되고 이 슬픔을 위안받고 싶어 하고 시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 시가 다른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제 자신을 또 위안해야 되겠죠.
그래서 저는 시를 쓸 때마다 항상 시가 나를 위로하고 또 나를 위로한 시가 다른 사람을 위로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삶의 이 슬픔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고통은 인간의 본질이다는 거죠.
그래서 그 인간의 본질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은 고통에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저는 요즘 깊게 하게 됩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인생은 고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바다에 사는 인간이라는 한 마리 물고기입니다.
그것도 물 속에 살면서도 목말라 하는 물고기다는 거죠.
그러면 물 속에 살면서도 목이 마르는 인간이라는 물고기 어떡하면 좋을까요?
물 속에 살면서도 목이 마르기 때문에 그 물을 찾아서 육지로 나와야 될까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에서 나오면 곧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장미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미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시 없는 장미는 사실은 존재 가치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장미의 그 향기는 어디에서 날까요?
저는 바로 가시에서 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장미의 향기는 바로 장미의 고통의 향기라는 거죠.
우리 인간에게도 인간으로서 향기가 난다면 바로 우리 인간 삶의 고통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언제 가장 고통스러울까요?
우리는 사랑이 있을 때 사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사랑이 시작되면 동시에 뭐가 시작될까요?
바로 고통이 시작되고 슬픔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내가 사랑하는데 왜 고통스럽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은 원하지만 나는 고통은 원하지 않는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고통이 있는 거다.
사랑과 고통은 서로의 한몸이라는 거죠. 위 상위의 이게 다른 말이 아니고 동의어라는 거죠.
"사랑 없는 고통은 있어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으로 이루어지지만 또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다.
사랑에는 반드시 슬픔이 있다는 거죠.
저는 슬픔의 본질을 사랑에서 저는 찾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말씀을 또 드리고 싶은데요.
우리가 이제 기쁨이라는 하나의 나무가 한 그릇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나무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요?
뿌리가 없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바로 제가 생각할 때는 기쁨이라는 나무는 슬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나무니까 기쁨의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거는 아니지 않을까요?
슬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만 있는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기쁨은 반드시 슬픔의 뿌리를 내려야 기쁨의 꽃이 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우리가 기쁨의 눈물이라는 말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까닭은 눈물이 기쁨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고요.
희망이라는 나무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라는 나무는 그 뿌리가 어디에 내려지고 있을까요?
바로 절망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의 뿌리를 내리지 않은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래서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바로 희망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희망은 반드시 슬픔과 절망이라는 뿌리에 뿌리를 내려야 어떤 기쁨의 꽃 희망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렇게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가치가 더 중요한가?
기쁨이라는 나무는 슬픔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하고 희망이라는 나무는 절망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슬픔이라는 가치 또는 절망이라는 가치를 폄하하고 이렇게 부정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이렇게 또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랑 없는 고통은 있어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기쁨 없는 슬픔은 있어도 슬픔 없는 기쁨은 없다"
이런 말씀을 한번 서로 함께 깊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으로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신작 시집을 발간했는데요.
그 시를 제가 한번 낭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택배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한다"
이러한 내용의 시입니다.
첫 행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했을 때 그 택배된 슬픔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별이라는 택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죽음을 통한 이별이라는 택배입니다.
이별에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이별이 있겠죠.
그런데 가장 견디기 어렵고 힘든 그 이별이 죽음이라는 이별 죽음을 통한 이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통한 이별이라는 택배를 사실은 누구나 다 받기 싫어하고 또 받지 않으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받기 싫어도 받아야 되는 것이 죽음을 통한 이별이라는 택배입니다.
운명이라는 말은 희극보다는 비극, 기쁨보다는 슬픔에 속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것은 나의 운명이야라고 생각했을 때
대부분 어 그 운명의 기쁨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가 슬픔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운명이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운명은 나 자신의 운명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의 운명대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운명을 원망하거나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나의 운명이 내 삶의 거룩한 땅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운명 그 비극과 슬픔을 긍정하고 이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는 웅덩이 같지 않았는데 비가 막 오면 이렇게 좀 움푹 꺼진 땅에는 무엇이 고입니까?
물이 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웅덩이가 됩니다.
이래서 여기에서 고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에 비가 오고 나면 산에 나무 뿌리들이 물을 받아들였다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어떻게 될까요?
그 물이 강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산의 물을 강이 받아들입니다.
또 그 강물은 어디로 흘러갑니까? 바다로 흘러갑니다.
만일에 바다가 강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다는 강물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바다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내 삶의 운명 내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그 부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운명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슬픔은 제가 생각할 때는 인간의 운명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린다면 운명이라는 말 속에는 비극과 슬픔이라는 말의 의미가 들어있는 거다.
이 비극과 슬픔을 인간의 운명적 그 본질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어쩌면 인간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 유대인들의 공동체에는 슬픔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커다란 슬픔의 나무 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슬픔의 나무에 가서 그동안 살면서 겪었던 모든 인생의 고통과 그 불행을 그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그 슬픔이 나무 주위를 이렇게 빙빙 천천히 걸으면서 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걸어둔 그 인생의 고통과 불행보다는 다른 사람이 걸어둔 그 고통과 불행,
즉 덜 고통스럽거나 덜 불행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자기 자신의 것과 바꾸기 위해서 그 슬픔의 나무를 이렇게 빙빙 이렇게 천천히 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기가 걸어놓은 것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고 자기 자신의 삶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슬픔의 나무 밑에 가서 다른 사람의 보다 더 가벼워 보이고 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그러한 것을 가지고
또 천국이 있다면 거기로 가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의 것을 선택하고 선택하게 되고 만다.
이것은 자기의 삶이 고통스럽던 그 당시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할지라도
결국 자기 자신이 겪은 그 슬픔의 고통이 불행이라는 고통이 다른 사람 것보다 훨씬 자기 자신의 것이 가벼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깨닫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슬픔의 나무를 돌다가 천상을 향해서 떠날 때는 그 슬픔의 나무에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슬픔의 나무를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그 고통보다 나의 고통이 더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무겁다고 생각하고 더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닐까
이 슬픔의 나무라는 슬픔의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삶의 비극과 슬픔과 고통과 그 불행을 깊게 한번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참으로 좋겠다.
저는 이렇게 또 생각됩니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슬픔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 인생의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방금 슬픔의 나무 우화에서처럼 제가 생각할 때는 인간은 무슨 힘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요.
저는 우리 삶의 어떤 그 슬픔을 그 비극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첫 번째 시간에게 좀 의탁해야 되지 않느냐 시간에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물론 시간에게 의탁해도 내 삶의 어떤 그 슬픔과 비극이 완벽하게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 치유의 힘이 되어서 내 삶의 고통의 무게를 조금 더 덜어주고 가볍게 해주지 않을까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결국은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슬픔과 비곡을 결국은 신에게 절대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또 그런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 없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용서는 신의 몫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의 몫이라는 거죠.
내 삶의 어떤 그 비극과 슬픔을 시간의 힘마저도 나를 치유해주지 않을 때 내 삶의 비극과 슬픔은 신의 몫이다 하고
신에게 절대자에게 그냥 맡기면 그러면 또 어떨까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한번 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은 어떤 비극적 존재고 인간은 슬픔이라는 그런 운명적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이유도 인간 삶의 어떤 그 비극 속에서 그 비극을 어떻게 서로 나눔으로써
서로 위안하고 서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어떤 과정 속에서 제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닐까
우리 인생에는 많은 비밀이 있어서 이 슬픔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비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슬픔이라는 비밀을 경험하면서 그 슬픔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긍정하지 아니할 때 더 슬프다는 거죠.
그러면서 우리는 슬픔이라는 인생의 비밀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적 존재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 매일 뭐 먹습니까?
물과 공기와 밥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슬픔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매일 먹는 그런 양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슬픔은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 본질적 가치입니다.
정호승 강사님은 호오컨설팅 스타 강사 섭외로 동기부여, 삶의자세, 인문학, 문학, 시, 창의, 창의력, 힐링, 희망 등
다양한 분야로 특강 강연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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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적으로 전문강사·MC님 같은 경우는 150만원 이하,
인지도가 높은 강사 ·MC님은 그 이상을
체크해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