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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성 강사님
강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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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부여( 동기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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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시작인 "조선은 왜 망하였는가?"라는 질문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입니다.
조선의 몰락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요?
특히나 그 중요한 시점, 1910년 8월 29일, 이 날은 조선의 통치가 공식적으로 끝난 날입니다.
그 날이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와 함께, 그 히스토리의 중요성을 함께 고찰해보려 합니다.
중국과 조선, 임금과 신하,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 등, 성리학에서는 각각의 쌍에서 어느 하나를 정통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적 사고는 조선 사회의 모든 층에 깊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외교 측면에서 조선은 '사대' 체제를 통해 큰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방향으로 통치하였습니다.
이는 성리학 철학 내에서 중국을 섬기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업 중심의 사회였으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백성들의 노력 덕분에 국가가 유지되었습니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이 그동안 유지된 이유는 그 안에 단단한 체제와 시스템, 그리고 백성을 아끼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대화가 시작되며 세계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자본주의, 평등, 자주적 국가라는 근대 사회의 원칙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조선은 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의 사회 체제는 여전히 농업 중심이었고, 자본주의와 평등의 원칙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신분제 체제가 계속 유지되면서 근대 사회의 평등 원칙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리지 못한 결과, 조선은 근대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1930년대, 전라도 광주 지역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그 경험과 발견들을 선교 보고서에 담아냈습니다.
특히 광주 양림동에서의 경험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양림동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 인터뷰 중에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라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에도, 인터뷰를 받은 500명의 여성 중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여성은 겨우 50명 미만이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요? 그 당시의 사회적 관점에서 여성은 이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한 도구로써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여성은 그 당시 사회에서 주로 가정 내에서의 역할에 집중하게 되어 이름이라는 개념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넘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500년 동안의 전통과 관행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와 발전은 느리게 이루어졌고, 이는 조선의 외교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 조선은 외세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운명을 그들에게 의존하며, 자국의 문제점들을 외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런 의존적인 태도는 1876년 개항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이를 대표하는 사건으로는 1882년의 이모군란이 있습니다.
조선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며 sos를 보냈습니다. 이런 상황은 갑신정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의 역사와 정치, 사회 구조는 500년 동안 성리학을 기반으로 운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력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발표되면서 대한제국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그의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우리는 이제 허약해졌다"라며 일본에게 운명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조선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세계사에서의 위치는 무척 중요했지만, 순종 황제의 결정은 내부와 외부의 다양한 압박과 변화하는 국제적 환경 속에서 힘겨운 선택이었습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병합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독립을 위한 노력들이 펼쳐졌지만, 일본은 그러한 움직임을 강압적으로 진압하였습니다. 3.1 운동은 그런 노력 중 하나로,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와 국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흡수된 것은 단순히 군사적, 정치적 약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회 구조와 체계,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조선을 움직였던 가치관과 철학이 현대화와 국제화의 파도 속에서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큰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선교사들이 광주 양림동에서 경험한 사실은 그 당시의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가치관을 대표하는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여성의 정체성과 가치는 주로 가정 내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여성 스스로의 개인적인 정체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부각시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많습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며, 그러한 과거의 오류와 배운 점을 통해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순간들에서 배운 교훈을 현대의 삶에 적용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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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적으로 전문강사·MC님 같은 경우는 150만원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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