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인 섭외&진행 노하우로 다져진 호오컨설팅은 행사 진행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자의 섭외를 통해 성공적인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한명기 강사님
강연일
조회수1090
인문학( 인문학, 역사, 고전, 문화, 한국사 )
경영( 리더십 )
정치( 한국정치 )
안녕하세요. 강연전문 블로그 생각의 꽃을 피우다 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인문학 강연은 명지대학교 한명기 교수님의 '지도자가 갖춰야할 시대정신'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리더십 강의 영상을 준비 했습니다. 한명기 교수님은 병자호란, 조선시대 임금의 리더십, 역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등 다양한 주제와 내용으로 강연을 진행하십니다.
인문학 강연 영상은 아래 하단에 있으니, 참고 부탁드리며 지금부터 바로 시작 하겠습니다.
1592년 음력 6월,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을 맞아 서울을 버리고 국경 도시인 의주까지 피난을 가졌습니다. 의주에서 선조가 지은 시가 오늘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에는 신하들이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해 왕인 선조 자신이 국경까지 피난하게 되었다는 비참한 심정과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덕수궁에서는 1623년 3월 13일, 광해군이 창덕궁에서 도망치다가 붙잡혀 즉조당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조카 인조에게 왕 자리를 빼앗겼던 것이죠. 광해군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반면, 인조는 몇 시간 후에 왕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1623년과 1624년에 경희궁에서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습니다.
인조는 광해군 시대의 정치가 엉망이었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탓에 자신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그 시대를 종식시켰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인조의 호기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636년 12월 17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인조는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조도 통곡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을 살펴볼 때 선조, 광해군, 인조 모두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훌륭한 임금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세 사람 모두 좋지 않은 말년을 보냈습니다.
왕의 권력이 낮아진 상황에서, 선조는 국가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려 했지만, 동인과 서인 사이의 갈등과 백성들의 불만은 계속해서 커졌습니다. 선조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같은 영웅들의 인기는 더욱 상승했고, 광해군 또한 자신보다 더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에 선조는 최고 통치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선조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 현명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으며, 이러한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권력과 인기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이순신과 곽재우의 업적을 인정하며, 이들을 활용하여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또한 동인과 서인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백성들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왕권의 회복과 국가의 안정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지배기간 동안 선조와 그의 정권은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통해 조선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력을 점차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선조는 국가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업적과 그의 정치적 성과는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콤플렉스 때문에 광해군은 선조와 비교할 때 더욱 강력한 권위 행사를 펼치려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국내 정치 분위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콤플렉스로 인해 그는 자신이 지키려는 왕위에 대한 위협에 과도하게 민감해져 왕자들을 학살하는 불행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국내 문화와 학술을 적극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국내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문화를 키워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의 시대에는 조선의 문화와 학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문화는 '조선의 문화 역사의 황금기'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결국 자신의 콤플렉스와 불안함으로 인해 권력에 집착하는 왕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국내 정치의 혼란을 겪으며, 조선은 점차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선조와 광해군은 모두 높은 권력에 오르고 하나의 국가를 이끌었으나, 각자의 문제와 콤플렉스로 인해 그들의 통치 기간에는 많은 문제와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왕과 나라의 리더가 가져야 할 자질과 권력에 대한 적절한 균형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을 쫓아낸 것에 큰 비판이나 명분을 내세우며 거창한 목표를 세웠지만, 실제로는 내부의 갈등과 투쟁으로 인해 개혁 의지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인조 정권에 대한 믿음과 지지를 점차 잃어갔고, 결국 광해군 정권보다 나은 점이 없다는 비아냥을 들으며 큰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조 정권은 초기의 목표와 비전을 실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더 큰 불만과 원망을 낳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오늘 강의를 통해 선조, 인조, 광해군 세 임금의 역사를 되짚어보았습니다. 이 세 임금은 비정상적인 조건에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이로 인해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거창한 명분과 구호만으로는 권력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생과 민심에 귀를 기울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이 역사적 교훈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세 실패한 군주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권력과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한 중요한 원칙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문학 강연 한명기 교수님의 리더십 강의 재미있게 보셨나요?
역사적 사실과 사례를 통해 현재 우리가 고민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되는 강연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진행률0%
평균적으로 전문강사·MC님 같은 경우는 150만원 이하,
인지도가 높은 강사 ·MC님은 그 이상을
체크해주셔야 합니다.